양혜규 나의 조카딸
- Posted at 2009/03/0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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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粱慧圭·38)란 설치미술가가 독일에서 흥미로운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들었다. 그후 국내외에서 역량있는 작가로 그의 이름이 꾸준히 거론되더니, 작년 연말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 대표작가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올해 6월부터 11월까지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올림픽이라 불리는 현대미술 축제다. 작가들에겐 국제무대에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양혜규는 한국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본 전시에도 참여한다.
양씨는 1994년 유학을 가서 15년째 독일에 살고 있지만 요즘은 1년 중 몇 달은 서울에서 작업한다. 마포구 아현동의 낡은 다세대 주택 1층에 있는 집은 바깥보다 더 어둡고 살림살이가 없어서 창고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아늑하게 느껴졌던 건 여기저기 놓인 '작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올해 6월부터 11월까지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올림픽이라 불리는 현대미술 축제다. 작가들에겐 국제무대에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양혜규는 한국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본 전시에도 참여한다.
양씨는 1994년 유학을 가서 15년째 독일에 살고 있지만 요즘은 1년 중 몇 달은 서울에서 작업한다. 마포구 아현동의 낡은 다세대 주택 1층에 있는 집은 바깥보다 더 어둡고 살림살이가 없어서 창고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아늑하게 느껴졌던 건 여기저기 놓인 '작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 ▲ 양혜규는 아현동을 좋아한다. 아현동은 상대방에 대해 궁금 해하지 않으면서 서 로를 인정해주는 사 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고 생각한 다. 이‘무언의 인 정’이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지고 갈 작품의 주제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양씨는 작은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검은색 스웨터와 바지를 입어서 그런지 안 그래도 깡마른 체구가 더욱 말라 보였다.
―'설치미술'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미술에서 조각이나 회화로 환원되지 않는 부분, 전통적인 장르로 묶이지 않는 분야를 뭉뚱그린 것이지요. 대학에 설치미술과라는 게 없잖아요. 저도 다양한 매체를 쓰기 때문에 설치미술가라고 불리는 거죠. 비디오, 사진, 오브제, 심지어 퍼포먼스까지 하는데 회화는 하지 않아요."
―한번 설치했던 작품은 어떻게 하죠?
"갖고 있어요. 나중에 다시 만들기도 해요. 2006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때 냈던 '블라인드 룸'이란 작품은 전시 후 해체했는데, 2007년에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센터가 그 작업을 재현했어요. 그러면 그게 오리지널이 되는 거죠. 다시 만들어 전시한다는 건 미술관이 엄청나게 헌신하는 거예요. 이런 미술관과 기획자들이 전문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을 정말 존경해요."
―베니스엔 어떤 작품을 가지고 갑니까.
"한국관 전시를 위해 아현동을 비디오로 찍는 작업을 해요. 베를린에 있는 부엌을 조각물로 만들고, 바람에 흔들리는 블라인드 구조물도 만들고 있어요. 본 전시엔 전등조각을 낼 생각이고요."
―그래서 아현동에 사는 건가요?
"거꾸로죠. 아현동에 살다가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이 동네에선 가게나 식당에 아무리 자주 가도 사람들이 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아요.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받아들여 준다고 할까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는 거죠. 제 주변 상황과 저 자신의 상호작용이 늘 작품의 주제가 돼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의 대표작가가 되는 건 스스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잠재돼 있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능력은 이미 쌓여 있어야 해요. 몇 달 동안 준비해서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해봐야 아는 거예요. 비엔날레에 가는 모든 작가가 다 대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또 한편으론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는 걸 무슨 종착역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게 참 싫죠. 두렵고요."
양씨가 독일로 유학 가게 된 건 우연이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시험에 떨어진 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낙방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대학시절 제 길을 찾지 못해 시들하게 지낸 탓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중엔 주로 유럽의 미술학교를 찾아다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일명 슈테델슐레)에 갔다가 우연히 게오르그 해롤드 교수를 만나 입학허가를 받게 됐다.
처음엔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부모가 송금해주는 돈으로 독일어를 배우고 학교에도 다녔다. 1997년 IMF 금융위기가 터지자 서울서 보내주는 돈은 이전과 금액이 같은데도 환전하면 3분의 1밖에 안 됐다. 그때부터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다. 전시장 지킴이, 사진가 조수, 바텐더, '클럽 기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 가냘픈 체격으로 어떻게 '클럽 기도'를 해요?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이 하면 오히려 자극이 돼서 문제를 더 일으킨다고 해서 저 같은 사람이 앞에 나서요. 그러다 진짜 일이 커지면 뒤에 숨어 있던 '떡대'들이 나오고요. 경제적으로 정말 힘든 때였어요. 그러나 미술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일밖에 못해요. 안 그러면 자기 생각을 못하거든요. 당연히 보수가 낮을 수밖에 없고요."
―그때 귀국할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아니요. 오히려 그게 계기가 돼서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 다닌 게 큰 자극이 됐고요. 외롭고 힘들었지만 '내가 외국인이니까 당연히 힘들어야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어요. 많은 일이 그 후에 시작됐어요. 일을 하면서 제 네트워크를 만들 수도 있었고요."
양씨가 다녔던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는 독특했다.
"학생 수가 150명도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예요. 그러나 졸업생들이 워낙 활발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미술 명문학교지요. 프랑크푸르트는 주식시장이 있고 박람회가 열리는 교역도시라서 그런지 문화적 전통의 무게가 없어요. 그래서 새로운 시도가 가능한 분위기죠."
양씨는 199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엔 관심이 없고 잡담만 하는 것처럼 보여 허탈했고 실망했다. 1997~98년쯤엔 지도교수의 영향을 벗어나 작가로서 독립적인 위치를 굳혔다고 느꼈다.
―예술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느꼈던 때가 언젠가요?
"2004년 '창고 피스(Storage Piece)'란 작품을 만들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걸 꼽지요. 전시도 여러 도시에서 많이 했고요. 저는 '층계형'으로 성장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겪을 거 다 겪어야 해요. 처음 시작했을 땐 지원금 같은 것 없이 제가 벌어서 온전히 다 쓰는 식이었어요. 학교 안에 중심적인 그룹이 있었는데 저는 거기 속하지 않았어요. 자부심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제가 독립적이라는 거죠. 미술계의 어느 '파'나 '끈' 이런 데 기대서 일하지 않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스스로도 그 작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대단히 중요했어요. 당시 런던에서 작업할 때는 완전히 지쳐 있었어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힘들었어요. 너무 자신을 밀어붙인 거예요. 상업적이고 빠르고 유명인사를 중시하는 도시 분위기도 저와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피하게 됐죠. 작품 제작에 들어갈 돈도 충분히 지원받지 못했고요. 그때 개인전을 하라는 제안이 왔는데 형편이 안 돼서 그전에 만든 것들을 긁어모아 '창고 피스'란 작품을 만들었어요. 위기 속에서 무언가가 나오긴 하는 거 같아요. 부인할 수가 없어요."
창고에 쌓아놓았던 예전 작품을 포장도 풀지 않은 그대로 모은 듯한 '새로운 작품'은 한마디로 '내용은 있으되 풀어놓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당시 그가 런던에서 느꼈던 상황과 심정을 작품화한 것이다.
―늘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창의성이 분출합니까?
"약간은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원해서 그렇게 산 건 아닌데 뒤돌아보니, 어려운 상황을 잘 견디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재능의 한계에 부닥쳐 본 일은 없나요?
"지금까진 없었어요. 작품 자체가 진행이 안 되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소진하고 지친 적은 몇 번 있지요."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는 거죠.
"반대죠. 점점 더 매달리죠."
런던에서 힘든 1년을 보내고 양씨는 베를린으로 갔다. 극도로 지친 상태라 작업은 잠시 쉬기로 하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야말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업무였다. 그 1년 반 동안 그는 '예술'을 떠나 있었다.
"'뭐든 다 하는 역할'이라고 할까요. 차를 몰고 가서 손님을 데려오기도 하고 중요한 회의에 가서 협상도 하고요. 1년 반 동안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일하고 남는 시간엔 책도 많이 읽었고요. 그리고 그때 비로소 창의적인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됐어요."
―다른 일을 해보니 예술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군요.
"예술가 중엔 일상적인 일을 잘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 무대에 서면 그것이 공연이든 문학이든 뭔가를 보여줍니다. 그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지요. 제가 남의 시중드는 역할을 해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예술가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 후엔 나를 내세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어졌어요."
―그전엔 어떤 예술가였나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어요. 그러나 이젠 예술가가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다는 걸 알아요. 대신 결정적인 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지요."
독일에서 외국인 학생으로 살았던 체험이 그를 '성실하게' 만들었다. 비자를 연장할 때마다 '양혜규란 작가가 왜 독일에 살아야 하느냐'를 증명해야 했다.
그때 그는 "내국인은 함몰돼서 보지 못하는 걸 봐주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제 피가 독일인들이 수혈받고 싶을 만큼 특이한 피여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인으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해요. 세금도 잘 내고 요금 안 내고 버스 타는 짓은 안 하지요. 작품도 더 철두철미해야 해요."
―과도하게 성실해서 지친 걸까요?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니까 자기조절이 안 돼요. 파고들다 보면 결국 자기파괴적인 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세운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기 때문인가요?
"일하는 시간도 스스로 정해야 하고요. 어딜 가도 그게 출장인지 여행인지 모호하죠. 모든 게 생활인지 예술인지 불분명해요. 그런 삶이 자유를 주기도 하는데 동시에 속박이기도 해요."
―별명이 '신 유목민'이라던데 정착하지 않을 건가요?
"누가 제게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세금을 베를린에서 낸다고 그래요. 제가 어디에 살든 세금을 내는 곳은 한 곳이거든요."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한동안 예술가들에게 집과 작업장을 제공해주는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으로 생계를 유지했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영국·일본·프랑스·네덜란드· 미국·독일 내 다른 도시에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1년씩 살았어요. 그런 기회가 생기면 집세를 안 내도 되고 비자도 연장할 수 있거든요."
―그럼 밥벌이는 어떻게 했어요?
"그때그때 하는 거죠. 작품이 팔리면 빚을 갚고 큰 작업을 하나 하고요. 미술관에서 전시 초대를 하면 기본적인 제작비가 나와요. 제가 먹고사는 건 스스로 벌고 작품은 미술관에서 돈을 받아 작업하죠. 화랑수입이 너무 적으니까요."
―요즘 베를린이 유럽에서 새로운 예술중심도시로 뜨고 있다면서요?
"베를린은 집값과 물가가 싸서 화가와 댄서와 화랑이 몰려들고 있어요. 가난한 예술가들 입장에선 작업장 구하기가 쉬운 곳이지요. 런던이나 파리에 비하면 베를린의 미술관 시스템은 여기저기 빈 곳이 많아요. 새로운 게 생기려면 빈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좋은 갤러리들이 들어와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어요. 외국인들이 미술관장인 경우도 많고요. 국제적인 예술의 중심지가 돼가는 거죠."
―장기적으로는 한국에 정착할 계획이라면서요?
"모국어도 중요하고요. 한국에선 영감을 많이 받을 수 있어요. 사회적으로 문제도 많은 것 같고 여기서 사는 게 왠지 힘이 들어요. 그런 게 다 작품과 연결돼요. 제 작품은 결국 제가 주변 상황을 어떻게 읽느냐와 관련이 있거든요."
- ▲ 1월 30일~5월 24일 캐나다의 그레이터 빅토리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치—개인적 한계에 대한 고민 라이트 조각 7점’./양혜규 제공
"특혜를 받은 삶이라고 생각해요. 고스란히 다 소진하고 또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뭘 소진한다는 건가요?
"예를 들어서 제가 블라인드와 빛을 이용한 작업을 많이 했는데 최근 스페인에서 한 전시는 규모가 아주 컸어요. 그때 완전히 마스터했으니까 이젠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거죠. 철저하게 천착하고 그다음엔 과감하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베니스에선 빛을 쓰지 않으려고 해요. 소진해서 결핍을 생성시켜야 하는 거죠."
―결핍이 있어야만 예술을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래야 다른 사람과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이뤄지거든요. 제가 강하고 자신감에 차 있을 때보다는 부족한 게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그때 열리는 겁니다. 제가 확신에 차 있을 땐 사람들이 제게 매료될 순 있겠지만 소통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매료시키는 건 전통적인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은 고뇌의 결과일까요?
"고뇌는 괴리감과 소외감의 결과이고요. 저차원적으론 불안 초조가 한 요인이 되지요. 작가는 단독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순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거죠."
―언제가 제일 힘듭니까?
"전시회 오프닝 때요. 설치작업을 집중적으로 한 후엔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나만 아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때 전시회에 온 사람들을 보면 막 쫓아내고 싶어요. 그런데 관중은 굉장히 무서운 존재거든요. 안보는 척하면서 다 보거든요. 그걸 다 아는데도 그 순간엔 막 화가 나요."
―독일 '카피탈'지가 선정한 세계 100위 안에 드는 설치 미술가란 평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카피탈은 경제지예요. 미술을 투자대상으로 봤을 때 그걸 위주로 선정하는 거죠. 등수 매긴다는 것 자체가 싸구려예요."
―삶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됩니까?
"99%지요."
―일 중독자군요.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일 중독이라고 하는데 예술가가 하면 헌신이라고 하죠."
―한국에 오면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지요?
"외로움은 당연히 치러야 하는 대가예요. 그것도 안 치르면 뭘 치르겠어요. 물론 소위 말하는 인간적인 욕망은 당연히 있지요. 발작처럼 밀려와요. 다 다스리진 못해요. 하지만 아직은 승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어요. '진짜 인간적인 게 그런 거야?' 하는 반감이지요. 아이 낳고 교외로 이사 가고 비즈니스 하는 친구들이 저를 보면 여전히 버너에 밥 해먹으면서 캠핑하는 것처럼 보이겠죠. 그래도 아직은 못하겠다 그런 생각이 있어요."
―어떤 식으로 살겠다는 원칙이 있어요?
"전 미술작업만 하잖아요. 그게 특권이고 운도 좋은 거에요. 부양가족이 있거나 누가 아프다면 어떻게 이 짓을 하겠어요. 그래서 단순하게 살려고 해요. 고민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지금까지 받은 교육과 체험 중 무엇을 통해 가장 많은 걸 배웠습니까.
"애정관계요. 하하! 저 까다로운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당신 작품은 왜 이렇게 어려우냐'는 기자들 질문에 그랬다잖아요. 어머니와의 관계, 애인과의 관계가 얼마나 어려우냐고요. 관계란 원래 어려운 거니까요."
―너무 일찍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나요?
"그건 모르죠. 제가 요절할 수도 있잖아요."
―미술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야망은 뭔가요?
"중요해지는 거예요. 유명세로 치자면 달력에 나올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그 아래요. 2등을 하고 싶어요."
―겸손한 건가요?
"아니요. 솔직한 거예요. 하하."
양혜규는 "감성적인 개념미술(emotional conceptualism)을 추구하는 설치미술가"라 불린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카네기 인터내셔널 등 국제적인 미술행사와 주요 미술관에서 초청받고 있다. 2006년 세계 최고의 미술시장인 아트바젤에서 발로아즈 예술상을 수상했다. 개인전으로 '대칭적 불평등'(2009·스페인), '불균등하게'(2006·네덜란드), '사동 30번지'(2006·인천), '창고피스'(2004·영국) 등이 있다. 12일 아트선재아트홀에서 '비디오 3부작'을 선보이고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 ▲ 2009년 제53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하는 설치미술가 양혜규씨. 조소를 전공한 양씨가 아현동 작업실에서 설치미술을 말한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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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과 서울을 오가며 설치미술 작업을 하는 미술가 양혜규씨..작업실이 있는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재개발로 파편으로 부서지고 얽혀있는 현장에서 양씨는 공존과 소통을 읽어내려고 애쓰며 2009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다. /이진한 기자
입력 : 2009.03.07 02:59 / 수정 : 2009.03.07 06:29
[2009 문화 나의 도전] <3> 설치미술가 양혜규
"비엔날레 국가대표로만 각인될까 우려
국내에도 작업문맥과 과정 알리고 싶어"
국내에도 작업문맥과 과정 알리고 싶어"
김지원기자
서울 아현동 집의 벽에 기대 선 양혜규씨. 숫자 배열이 뒤죽박죽인 시계는 '사동 30번지'전 때 선보인 것이고, 작가가 가장 좋아한다는 비닐로 덮은 창문은 빛 대신 검은 벽을 마주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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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가 양혜규(38)씨가 살고 있는 서울 아현동의 낡은 집은 마치 설치작품 같았다.
검은 줄에 길게 매달린 백열등, 숫자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그나마 시간도 안 맞는 벽시계, 2년간 한번도 작동이 안 됐다는 텔레비전, 테두리 없이 덜렁 본체만 있는 구식 거울까지.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이 집은 2006년 인천의 폐가에서 열린 그의 첫 국내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떠올리게 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4년 독일로 가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양씨는 카네기 인터내셔널,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 세계적 미술행사와 유수의 미술관에서 잇따라 초청받고 있는 작가다. 올해는 국내 대중에게도 성큼 다가오게 된다.
6월 개막하는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대표작가로 뽑혔기 때문이다. 소감을 묻자 양씨는 "운동선수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마치 국가대표 선수를 대하는 것 같은 격려와 기대가 생소해요. 본체 없이 이름만 떠다닐까봐, 소통하고 전달해야 할 부분이 잊혀질까봐, 경계심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국내 미술팬들에게도 자신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중계'하기로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불꽃놀이 같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긴 여행 속 하나의 정거장이기에 작업의 문맥과 과정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작품세계를 정리한 책 발간을 준비하고 있고, 2월에는 한국관 커미셔너 주은지씨가 기획하는 전시 '나누기: 공공 재원'에 참여한다. 아트선재센터 로비를 도서관으로 만드는 기획이다. 내년에는 두번째 국내 개인전을 연다.
'감성적 개념미술을 추구하는 설치미술가'로 불리는 양씨는 요즘 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한국 작가 중 하나다. 그는 "줄(?)도 없이 독립적으로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기적 같다"면서 "이방인으로서 늘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0여년을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던, 일본, 뉴욕, 베를린까지 지원금을 따라 유랑극단처럼 살아왔다는 그는 클럽의 보안요원, 바텐더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몇 번의 변화를 거쳤다. 오래된 교과서에서 인쇄된 부분은 지우고 필기한 흔적만 남긴 '무명학생작가의 흔적', 공ㆍ사적 영역의 사이에 놓여진 평상을 찍은 사진 작업 등 철저하게 관찰자적 입장에 서 있던 그는 2004년 런던에서 선보인 '창고 피스'를 계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을 보관할 창고가 없어 고민하다 전시장에다 포장된 상태의 작품을 쌓아놓은 것인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됐다.
최근에는 빛과 온도, 바람, 향기, 소리 등 보편적 감각을 동원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말하는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목적을 가진 이익집단이 아니라 개별자들이 이룬 '부재의 공동체'의 미술적 구현이 그의 관심사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후미진 위치와 협소한 크기, 복잡한 형태로 늘 아쉬움을 남겼다. 유리 외벽 때문에 빛이 많이 들어 전시를 하기엔 적당치 않다고도 한다. 그러나 올해는 오히려 이런 악조건이 기대를 부풀린다.
"주어진 것을 맞닥뜨리고 응대하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양씨는 "빛을 걸러내지 않고 끌어안으려 한다. 또 바람을 이용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나의 조카딸이 신문에 나서 나도 놀랐다. 어릴적 생각도 나고...
내가 기억나는 혜규 글세...
붙임성이 많고 동생을 끔찍이도록 잘 보살피고...
돌이 솔이 혜규 혜규 엄마도 보인다. 정말로 어릴적 사진이다.
검은 줄에 길게 매달린 백열등, 숫자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그나마 시간도 안 맞는 벽시계, 2년간 한번도 작동이 안 됐다는 텔레비전, 테두리 없이 덜렁 본체만 있는 구식 거울까지.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이 집은 2006년 인천의 폐가에서 열린 그의 첫 국내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떠올리게 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4년 독일로 가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양씨는 카네기 인터내셔널,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 세계적 미술행사와 유수의 미술관에서 잇따라 초청받고 있는 작가다. 올해는 국내 대중에게도 성큼 다가오게 된다.
6월 개막하는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대표작가로 뽑혔기 때문이다. 소감을 묻자 양씨는 "운동선수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마치 국가대표 선수를 대하는 것 같은 격려와 기대가 생소해요. 본체 없이 이름만 떠다닐까봐, 소통하고 전달해야 할 부분이 잊혀질까봐, 경계심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국내 미술팬들에게도 자신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중계'하기로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불꽃놀이 같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긴 여행 속 하나의 정거장이기에 작업의 문맥과 과정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작품세계를 정리한 책 발간을 준비하고 있고, 2월에는 한국관 커미셔너 주은지씨가 기획하는 전시 '나누기: 공공 재원'에 참여한다. 아트선재센터 로비를 도서관으로 만드는 기획이다. 내년에는 두번째 국내 개인전을 연다.
10여년을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던, 일본, 뉴욕, 베를린까지 지원금을 따라 유랑극단처럼 살아왔다는 그는 클럽의 보안요원, 바텐더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몇 번의 변화를 거쳤다. 오래된 교과서에서 인쇄된 부분은 지우고 필기한 흔적만 남긴 '무명학생작가의 흔적', 공ㆍ사적 영역의 사이에 놓여진 평상을 찍은 사진 작업 등 철저하게 관찰자적 입장에 서 있던 그는 2004년 런던에서 선보인 '창고 피스'를 계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을 보관할 창고가 없어 고민하다 전시장에다 포장된 상태의 작품을 쌓아놓은 것인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됐다.
최근에는 빛과 온도, 바람, 향기, 소리 등 보편적 감각을 동원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말하는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목적을 가진 이익집단이 아니라 개별자들이 이룬 '부재의 공동체'의 미술적 구현이 그의 관심사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후미진 위치와 협소한 크기, 복잡한 형태로 늘 아쉬움을 남겼다. 유리 외벽 때문에 빛이 많이 들어 전시를 하기엔 적당치 않다고도 한다. 그러나 올해는 오히려 이런 악조건이 기대를 부풀린다.
"주어진 것을 맞닥뜨리고 응대하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양씨는 "빛을 걸러내지 않고 끌어안으려 한다. 또 바람을 이용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나의 조카딸이 신문에 나서 나도 놀랐다. 어릴적 생각도 나고...
내가 기억나는 혜규 글세...
붙임성이 많고 동생을 끔찍이도록 잘 보살피고...

돌이 솔이 혜규 혜규 엄마도 보인다. 정말로 어릴적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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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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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용이 좀 난해하기도 하구
어릴때 참 같이 놀던게 엊그제 같은데
회사 근처에 사는데 만날 기회가 없네 그려....-
어릴때 너아버지가 차에 돌이 솔이 혜규를 데리고와서 우리집에 오래 살았지. 근데 그때 너가 혜규를 너무 때려 많이 매맞았지...
동생도 일찍본데다가 조카까지 와서 아마도 샘이 많이 난것같아서 참으로 미안햇지.
그래도 잘 지내고해서 이렇게 신문에도 나니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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