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처럼 이렇게 여러 가지 하는 직업도 드물거예요"
"잡것이지 뭐"
기생충 검사를 위한 채변 봉투를 받아들고 우리는 약간 기가 죽었다.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런 일을 위해 교사 자격증이라는 거룩한 전문직 간판을 내걸 필요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알고보니 그럴듯한 간판 뿐이었다. 이런 것 말고도 그 밖의 갖가지 허드레 일하는데 자격증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종이 쪽지란 말인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딱딱하기만 할 뿐이다.
이제 일주일의 일과가 몸에 익어 제법 신명나게 돌아갈 판에 아침부터 냄새나는 채변 봉투를 받아 쥐니 기가 죽을 수 밖에. 그런데 진짜는 그보다 좀 더 뒤에 나타난 것이다.
"원호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학교 학생들도 전부 1백원씩을 내도록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방위성금이 아닌가 하는 모양인데 이번의 것은 원호성금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도 내는 것이 많으니 착각할 만도 하다. 하긴 돈 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원호성금이건 방위성금이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건 매일반이니 개의할게 못된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직접 관여하는 일도 아닐테고, 거기다 모두가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이라는데 뭐 굳이 조목을 따질 신경까지 있을라고.
"선생님들께서도 일괄 5백원씩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이번 월급에서 떼기로 했습니다."
이달 월급에서 또 5백원이 적자인 셈이다. 교실에 들어가 한마디 운을 떼자마자 아이들 얼굴이 찡그려진다. '돈, 돈'하는 노골적인 표현이다.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뭐 내가 내라는 돈인가, 왜 나에게 투덜대지! 선생님이 내라면 낼 것이지!
순간 나는 내가 무쇠탈을 쓴 강도라고 생각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한가지인 셈이다. 나는 심기(心氣)를 가라앉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무쇠탈이 아닌 불타의 모습으로 바꾸어 볼 심산에서다.
"팔상록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시주를 청하여 모든 중생에게 공덕인연을 맺으라 말씀하셨으매, 한 제자가 어느 토굴 옆을 지나는데 늙은 내외가 헌 누더기 한채를 끌어안고 자거늘 전생의 복 없음이라 여기고 인연을 맺게 하려는 마음으로 시주를 청하였다 한다. 그 때 부인이 말하기를 누더기 한개로 서로 번갈아 겨우 몸을 가리고 사는데 어찌합니까 하거늘 사문(沙門)은 계속 보시(布施)하라하니 부인이 남편더러 하는 말이, 전생에 보시를 못하여 금생에 이리 빈천하였으니 앞일이야 죽던 살던 보시하여 보자 하며 서로 몸을 가리고 그 누더기 한벌을 내어주었다 한다. 나중에 세존께서 이를 이르며 말씀하시기를 비록 쓸데없는 누더기나 그 임자에게는 극히 애중한 것이니 몸을 감추고 벗어 준다는 것은 그 맘에 일점 애착이 없음이니 이는 성현이라 하며 기뻐하셨다. 이 얘기를 들은 왕도 탄복하여 그 부부에게 크게 상을 내리시고 영화를 베풀어 주었다 한다."
"너희 가운데는 아마 이들 부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니 나라 위해 싸우다 가신 분들의 가족을 위한 성금이니 만큼 추호라도 불만의 뜻을 품지 말고 그야말로 보시토록 해라."
이 정도면 훌륭하게 설복했으리라 만족하며 교실을 나왔다. 그러나 채 한 계단도 내려가지 못하여 나는 갑자기 잡것이란 말이 떠올랐다.
"잡것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잡것"
나는 아마도 얘기를 하는 것에 만족했었나 보다. 듣는 사람의 쪽에서도 만족을 했을까 하는 것은 생각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약 윗사람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면 나는 전적으로 수긍했었을까. 아니다. 아마도 나는 웃었을 것이었다. 나같은 악동이라면 분명 "그건 거짓말이야, 부처가 만들어낸 거짓말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낸 거짓말이야"하며 웃었을 것이었다.
나는 몸을 떨었다. 어떤 선배는 '철저한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했으니 비록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못해도 교단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고 치자. 그 괴로운 거리감으로 뒤끓는 선생이란 직업의 전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훨씬 완전할지라도 교단에서는 좀 서툴고, 불완전하고 더 좀 약점 투성이일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할까.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일분도 못되어 나의 이런 괴로움이 잊혀지리라는 것을. 이런 것을 의식의 사치라고 부르는게 아닐까. 이런 사치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겸손해질 수 있을 텐데......
안해도 될 이야기를 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내 행위는 자기에게로 돌아올줄 모르고 쏜 화살과 무엇이 다르랴.
차라리 무쇠탈 쪽이 훨씬 덜 교활하지 않은가. 글쎄, 아무래도 부처님 쪽이 덜 개인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글쎄 그런가?
한쪽은 무쇠탈이고, 다른 한 쪽은 부처인 것, 그런게 사람인가? 글쎄 그런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어려운 얘기가 되어 버렸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모르는게 많나 보다. 더구나 요즈음은 더욱 모르는 게 많아졌다. 세상이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가 된 것 같다. 나는 기가 죽어서 교무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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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 '김하경'씨에게 있습니다. 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잡것이지 뭐"
기생충 검사를 위한 채변 봉투를 받아들고 우리는 약간 기가 죽었다.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런 일을 위해 교사 자격증이라는 거룩한 전문직 간판을 내걸 필요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알고보니 그럴듯한 간판 뿐이었다. 이런 것 말고도 그 밖의 갖가지 허드레 일하는데 자격증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종이 쪽지란 말인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딱딱하기만 할 뿐이다.
이제 일주일의 일과가 몸에 익어 제법 신명나게 돌아갈 판에 아침부터 냄새나는 채변 봉투를 받아 쥐니 기가 죽을 수 밖에. 그런데 진짜는 그보다 좀 더 뒤에 나타난 것이다.
"원호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학교 학생들도 전부 1백원씩을 내도록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방위성금이 아닌가 하는 모양인데 이번의 것은 원호성금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도 내는 것이 많으니 착각할 만도 하다. 하긴 돈 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원호성금이건 방위성금이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건 매일반이니 개의할게 못된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직접 관여하는 일도 아닐테고, 거기다 모두가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이라는데 뭐 굳이 조목을 따질 신경까지 있을라고.
"선생님들께서도 일괄 5백원씩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이번 월급에서 떼기로 했습니다."
이달 월급에서 또 5백원이 적자인 셈이다. 교실에 들어가 한마디 운을 떼자마자 아이들 얼굴이 찡그려진다. '돈, 돈'하는 노골적인 표현이다.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뭐 내가 내라는 돈인가, 왜 나에게 투덜대지! 선생님이 내라면 낼 것이지!
순간 나는 내가 무쇠탈을 쓴 강도라고 생각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한가지인 셈이다. 나는 심기(心氣)를 가라앉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무쇠탈이 아닌 불타의 모습으로 바꾸어 볼 심산에서다.
"팔상록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시주를 청하여 모든 중생에게 공덕인연을 맺으라 말씀하셨으매, 한 제자가 어느 토굴 옆을 지나는데 늙은 내외가 헌 누더기 한채를 끌어안고 자거늘 전생의 복 없음이라 여기고 인연을 맺게 하려는 마음으로 시주를 청하였다 한다. 그 때 부인이 말하기를 누더기 한개로 서로 번갈아 겨우 몸을 가리고 사는데 어찌합니까 하거늘 사문(沙門)은 계속 보시(布施)하라하니 부인이 남편더러 하는 말이, 전생에 보시를 못하여 금생에 이리 빈천하였으니 앞일이야 죽던 살던 보시하여 보자 하며 서로 몸을 가리고 그 누더기 한벌을 내어주었다 한다. 나중에 세존께서 이를 이르며 말씀하시기를 비록 쓸데없는 누더기나 그 임자에게는 극히 애중한 것이니 몸을 감추고 벗어 준다는 것은 그 맘에 일점 애착이 없음이니 이는 성현이라 하며 기뻐하셨다. 이 얘기를 들은 왕도 탄복하여 그 부부에게 크게 상을 내리시고 영화를 베풀어 주었다 한다."
"너희 가운데는 아마 이들 부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니 나라 위해 싸우다 가신 분들의 가족을 위한 성금이니 만큼 추호라도 불만의 뜻을 품지 말고 그야말로 보시토록 해라."
이 정도면 훌륭하게 설복했으리라 만족하며 교실을 나왔다. 그러나 채 한 계단도 내려가지 못하여 나는 갑자기 잡것이란 말이 떠올랐다.
"잡것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잡것"
나는 아마도 얘기를 하는 것에 만족했었나 보다. 듣는 사람의 쪽에서도 만족을 했을까 하는 것은 생각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약 윗사람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면 나는 전적으로 수긍했었을까. 아니다. 아마도 나는 웃었을 것이었다. 나같은 악동이라면 분명 "그건 거짓말이야, 부처가 만들어낸 거짓말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낸 거짓말이야"하며 웃었을 것이었다.
나는 몸을 떨었다. 어떤 선배는 '철저한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했으니 비록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못해도 교단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고 치자. 그 괴로운 거리감으로 뒤끓는 선생이란 직업의 전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훨씬 완전할지라도 교단에서는 좀 서툴고, 불완전하고 더 좀 약점 투성이일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할까.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일분도 못되어 나의 이런 괴로움이 잊혀지리라는 것을. 이런 것을 의식의 사치라고 부르는게 아닐까. 이런 사치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겸손해질 수 있을 텐데......
안해도 될 이야기를 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내 행위는 자기에게로 돌아올줄 모르고 쏜 화살과 무엇이 다르랴.
차라리 무쇠탈 쪽이 훨씬 덜 교활하지 않은가. 글쎄, 아무래도 부처님 쪽이 덜 개인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글쎄 그런가?
한쪽은 무쇠탈이고, 다른 한 쪽은 부처인 것, 그런게 사람인가? 글쎄 그런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어려운 얘기가 되어 버렸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모르는게 많나 보다. 더구나 요즈음은 더욱 모르는 게 많아졌다. 세상이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가 된 것 같다. 나는 기가 죽어서 교무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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