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도에 보낼 학용품 수집이 내일까지 입니다.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폐.휴지 수집이 내일부터 이틀 동안 있겠습니다."
"내집 앞 쓸기 통계 내주시기 바랍니다."
"저축을 독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반공훈화 가정통신 회신문 수합하여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말 출석 통계 내주시기 바랍니다."
"새마을 어머니반 소집일이 내일 X시입니다. 많이 참석토록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
"오늘은 선생님들께서 직접 꼭 도시락 점검을 해 주십시요. 저도 직접 교실을 돌아보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전달이 떨어지고 나서 직원 조회는 끝났다.
교실로 올라가면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뒤에서 벌써 교장 선생님이 올라오고 있었다.
쫒기듯 교실로 들어섰다.
인사를 마치고 출석부를 편 후 나는 돌아서서 지시사항을 칠판에 적었다. 그리곤 "도시락 꺼내서 모두 펴놔요."하고 재촉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살피기도 전에 도시락에 담긴 보리알을 세는 일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퉁퉁 불은 보리알은 우리 아이들의 얼굴처럼 순박하고 어쩌면 가난한 우리들에게 더없이 친근감을 주는 양식임에 분명하다. 이미 본능적으로, 선천적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의 양식이 되어온 보리를 나는 자조(自嘲)가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 터에 그것이 국가시책으로 장려되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 적극 호응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웬지 자꾸 석연치가 않은 데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방법'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좋은 시책이라도 교육 현장에 들어올 때는 교육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 날이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조선생을 부르시더니 빨리 교실로 올라가 보라는 것이었다.
장학사가 예고 없이 시찰나왔는데 지금 조선생반 도시락 점검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조선생은 곧 교실로 올라갔다. 얼마 후에 그는 침통한 얼굴이 되어 내려왔다.
도시락을 점검하는 장학사의 뒤를 따르다 보니 아이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 시선을 받자 갑자기 그는 자신이 아이들 앞에 이미 설 수 없는, 권위를 상실한 선생이 되었음을 직감했다는 것이다. 교실에서만은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던 자기 선생님 위에 더 높은 누가 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눈치채고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모멸과 수치 때문에 더 이상 그 자리를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면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도시락 점검을 교육적으로 할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타율이 그러한 교육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의심한 아이들은 겉으로는 선생님 말을 진심으로 듣는척 하겠지만 늘 선생 위에 군림하는 어떤 힘을 연상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생이 보고한 통계를 의심하고 직접 교실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장학사나 조회시간까지 순시하며 도시락 점검을 확인해야 하는 교장 선생님, 이 모두가 나를 슬프게 한다.
아무리 국가 시책이 절박하고 중차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교육적인 것이 되려면 교육적인 방법을 따라야 한다.
국가에서는 '시책'이지만, 학교에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닌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설득과 감화의 과정을 통해서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자율적인 또 스스로의 충동에 힘 입지 않고서는 교육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명령 하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것은 교육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상부 하달식의 방법은 교육에서 위험한 일이다. 동기를 유발시켜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지 보고된 통계 수치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는 없다.
순진한 학생, 고분고분한 교사, 그래서 이나라에서 그래도 가장 믿을만한 통계라면 역시 학교밖에 없다는, 그래서 학교가 가장 정확한 통계치의 산실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학생도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니 이것도 교육적으로 지도한다는 데는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그러다가 학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선행되지 못하고 마는 일이 있을까 함이다.
최초의 근원을 좇아 한없이 가다보면 언제나 근원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 교육이다. 따라서 교사란 이 최초의 근원을 기억하여 되살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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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 '김하경'씨에게 있습니다. 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폐.휴지 수집이 내일부터 이틀 동안 있겠습니다."
"내집 앞 쓸기 통계 내주시기 바랍니다."
"저축을 독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반공훈화 가정통신 회신문 수합하여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말 출석 통계 내주시기 바랍니다."
"새마을 어머니반 소집일이 내일 X시입니다. 많이 참석토록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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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선생님들께서 직접 꼭 도시락 점검을 해 주십시요. 저도 직접 교실을 돌아보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전달이 떨어지고 나서 직원 조회는 끝났다.
교실로 올라가면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뒤에서 벌써 교장 선생님이 올라오고 있었다.
쫒기듯 교실로 들어섰다.
인사를 마치고 출석부를 편 후 나는 돌아서서 지시사항을 칠판에 적었다. 그리곤 "도시락 꺼내서 모두 펴놔요."하고 재촉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살피기도 전에 도시락에 담긴 보리알을 세는 일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퉁퉁 불은 보리알은 우리 아이들의 얼굴처럼 순박하고 어쩌면 가난한 우리들에게 더없이 친근감을 주는 양식임에 분명하다. 이미 본능적으로, 선천적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의 양식이 되어온 보리를 나는 자조(自嘲)가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 터에 그것이 국가시책으로 장려되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 적극 호응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웬지 자꾸 석연치가 않은 데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방법'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좋은 시책이라도 교육 현장에 들어올 때는 교육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 날이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조선생을 부르시더니 빨리 교실로 올라가 보라는 것이었다.
장학사가 예고 없이 시찰나왔는데 지금 조선생반 도시락 점검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조선생은 곧 교실로 올라갔다. 얼마 후에 그는 침통한 얼굴이 되어 내려왔다.
도시락을 점검하는 장학사의 뒤를 따르다 보니 아이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 시선을 받자 갑자기 그는 자신이 아이들 앞에 이미 설 수 없는, 권위를 상실한 선생이 되었음을 직감했다는 것이다. 교실에서만은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던 자기 선생님 위에 더 높은 누가 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눈치채고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모멸과 수치 때문에 더 이상 그 자리를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면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도시락 점검을 교육적으로 할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타율이 그러한 교육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의심한 아이들은 겉으로는 선생님 말을 진심으로 듣는척 하겠지만 늘 선생 위에 군림하는 어떤 힘을 연상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생이 보고한 통계를 의심하고 직접 교실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장학사나 조회시간까지 순시하며 도시락 점검을 확인해야 하는 교장 선생님, 이 모두가 나를 슬프게 한다.
아무리 국가 시책이 절박하고 중차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교육적인 것이 되려면 교육적인 방법을 따라야 한다.
국가에서는 '시책'이지만, 학교에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닌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설득과 감화의 과정을 통해서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자율적인 또 스스로의 충동에 힘 입지 않고서는 교육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명령 하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것은 교육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상부 하달식의 방법은 교육에서 위험한 일이다. 동기를 유발시켜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지 보고된 통계 수치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는 없다.
순진한 학생, 고분고분한 교사, 그래서 이나라에서 그래도 가장 믿을만한 통계라면 역시 학교밖에 없다는, 그래서 학교가 가장 정확한 통계치의 산실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학생도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니 이것도 교육적으로 지도한다는 데는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그러다가 학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선행되지 못하고 마는 일이 있을까 함이다.
최초의 근원을 좇아 한없이 가다보면 언제나 근원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 교육이다. 따라서 교사란 이 최초의 근원을 기억하여 되살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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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 '김하경'씨에게 있습니다. 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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